2011년 06월 10일
시위대와 경찰은 적이 아니다.
저의 주관적인 생각들로 인해
상처를 입으셨을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 by | 2011/06/10 14:00 | Note | 덧글(7)
# by | 2011/06/10 14:00 | Note | 덧글(7)
교회 설교시간에 KAIST 학생의 연이은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극단의 선택을 해야 했던 학생들에 대해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주된 내용은 ‘참으라, 영광의 날이 올지니’였다. 듣는 가운데 자살의 원인을 개인의 나약한 심성과 인내심 부족으로만 한정 짓는 듯하여 마음이 불편했다.
서남표 총장으로 대표되는 교육관에 대한 비판이 인터넷 공간을 채우는 가운데, 학생들을 자살로 몰아갔던 이유를 단지 우수했던 학생들이 학업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충격과 학점미달로 인한 징벌적 등록금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으로 판단하는 것은 현상의 표면만을 보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철저히 외롭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가족과 함께 생활했던 학생들이 처음 낯선 곳에서 홀로 생활하며 지내는 것부터가 상당한 외로움을 감내해야 하는 환경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착실하게 공부하면서 생활해왔던 학생들이 가진 공통적인 성향인 조용하고 먼저 나서서 남과 어울려 지내는 것에 익숙치 않은 성향은 홀로 남겨진 외로움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학점 경쟁으로 인하여 선배가 후배를 챙겨 줄 시간적 여유도, 동기들과 어울려 동료애를 도모할 기회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했을 수 있다. 옆에서 위로하고 공감할, 같이 불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 학생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자살할 사람들은 약해 빠져서 그런 것이니 어떤 상황에 처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90%의 학생들은 경쟁을 잘 이겨내고 있는데 10%를 위해 제도를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말도 있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 자살 증가율 1위라는 우리의 현실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일까? 자살율의 증가는 이렇게 90%만 잘 되면 10% 쯤은 사라져도 좋다는 사고가 우리 사회에 만연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따지면 극단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같은 것이 발생했을 때, 해당지역 10%인구만 희생하면 나머지 90%의 국민들은 전기를 편안히 쓸 수 있으니 그 지역 사람들쯤은 희생시켜도 좋다는 식의 사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세계 1위가 되기 위해, 보다 잘 살기 위해, 아니 그냥 단지 글로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정도 경쟁은 반드시 필요하고 이겨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고 있는 경쟁의 방법이 맞는 것인가? 낙제도 하고 수업을 빼먹던 아인슈타인이 90% 학생에 들었을 것인가? 스티브 잡스가, 빌 게이츠가 학교에서 학점이 좋아서 성공했는가? 자살한 고흐가 당대에 인정을 받아서 훌륭한 예술가인가?
사회구성원이 영어를 더 잘하고, 수학문제를 더 잘 풀고, 물리학을 더 잘 이해한다고 해서 사회의 경쟁력이 증가하기 보다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재능을 펼쳐 낼 수 있을 때 그 사회의 경쟁력이 증가하는 것이 아닐까? 생물학적 다양성이 생태계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처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도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격려해야 되지 않나.
경쟁이 효율과 성과를 높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경쟁의 결과로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나 역시 경쟁이 없었으면 이렇게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경쟁과 시험의 효과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경쟁의 방향이란 것이 과연 맞는 방향인 것인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가 하는 경쟁은 개인과 개인이 서로 투쟁하는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닐까? 홉스가 자연 상태의 인간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라고 한 것과 지금이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개개인이 다투어 나가는 구조의 경쟁만을 추구한다면 국가와 공동체는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
경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경쟁의 방향과 경쟁의 대상이 맞는지는 항상 검토해야 하는 일이다. 더불어 경쟁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지 역시 늘 검토되어야 한다. 국어와 국사는 깡그리 몰라도 영어만 잘하면 된다는 오늘날의 입시 경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생각해 볼 기회도 없이 입사를 위해, 등록금을 위해 해야 하는 학점 경쟁, 점수를 잘 주는 과목에만 몰리고 정작 많은 것을 얻는 수업을 기피하게 되는 경쟁.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잘하기만 하면 된다는 경쟁. 이것이 제대로 된 경쟁의 방향인가.
경쟁은 구성원간의 점수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자기자신을 얼마나 발전시키느냐에 대한 경쟁이 되어야 한다. 구성원과 협력을 통하여 과거의 자기자신보다 더 발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규정한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기회를 통해 다양성과 관용을 길러내는 경쟁이 되어야 한다.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장 내가 앉아 있는 연구실의 구성원이 다들 나의 적이고 내가 경쟁해서 이겨야 될 상대라고 생각하며 공부하는 것이 공부의 효율을 올릴 수도 있다. 내 앞에 앉은, 내 옆에 앉은 녀석들보다 더 오래 앉아 더 집중하여, 학점으로 논문으로 이기겠다는 경쟁심이 내 성과를 올릴 수 있다. 아니, 실제로 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을까. 홀로 고독하게 논문과 책을 펼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까. 동료들과 격의 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토론하고 함께 연구하는 것이, 그리고 어제의 나보다 좀 더 집중하고 노력하는 것이 보다 높은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시간을 아껴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는 것은 어제의 나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며, 내 옆에 앉은 사람들을 이기기 위해서 더 오래 앉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세계 각국에서 연구실에 앉아 있을 학생들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오래 갈 수 있다. 그래야 멀리 갈 수 있다.
내 동료의 학점이 더 높으니, 논문이 더 좋은 저널에 나왔으니, 나보다 잘났으니 시기하고 질투하는 환경보다는 훌륭한 동료가 옆에 있어서, 그가 노력하는 자세를 본받을 수 있어서, 그를 통해 격려 받을 수 있어서, 그리고 그를 통해 나의 문제점을 극복해낼 수 있어서 고맙고 행복한 환경이 필요하다. 이러한 환경이 단지 학점경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by | 2011/04/10 16:16 | Note | 트랙백 | 덧글(7)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만큼이나 폭발적인 지탄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인 “나는 가수다”에 대해 김어준이 한 마디를 했다.
김어준 기사 (신문사가 제목을 너무 자극적으로 뽑아 놓았다.)
"제가 보기에 가수나 개그맨 반응은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제작진이 거부했다면 김건모는 쿨하고 김제동은 착하고 이소라는 섬세하고 제작진은 단호하고 프로그램은 김건모조차 떨어뜨리는 최고의 권위를 확보하고 결과적으로 세계 최고의 방송이 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제 김건모는 약간 찌질하고 김제동은 오지랖이고 이소라는 땡깡부린게 됐다. 1등의 의미도 없어지고 평가단은 바보가 되고 프로그램은 난리나고 시청자는 화가 났다"고 비난했다.
방송을 시청했던 한 사람으로서 김어준의 비판에 공감하며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두 가지를 정리하고 싶다. 1. 왜 출연진과 제작진이 결과적으로 최악의 의사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의사결정 과정의 실수에 대해 점검해 볼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 2. 사람에 대한 판단은 그가 처했던 상황을 고려해야지 한면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애초 김건모의 재도전 논의는 제동이 재도전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떠할지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주변에 동의를 구하며 그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던 것이 논의를 실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제동이 재도전 발언을 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착하기 때문에 눈 앞에 망연자실해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며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는 점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제의는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거부하기 힘든 것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김제동이 재도전에 대해 주변의 동의를 유도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나 싶다. 김제동은 원래 대형행사를 진행하며 사회를 본 경험이 풍부하다. 사회를 볼 때는 관중의 호응이 없어도 ‘좋지 않습니까~’를 연발하며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그 과정은 다소 양떼몰이 같은 측면이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환호를 하고 박수를 치게 된다. 특히 서로 동료이고 같이 활동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여기서 반대의견을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속으로는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의견이 나온 이상 떠밀려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우승자도 아니고 탈락자가 된 사람을 떨어뜨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 정서상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서 박명수가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것은 훌륭한 일이다. 박명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면 최악으로 가는 상황을 면할 기회가 한 번 있었다. 그러나 제작진은 재도전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두번째 기회를 놓쳤다. 제작진은 김건모에게 재도전 선택권을 넘겼고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재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었다. 세번째 기회까지 사라진 것이다.
돌이켜보면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매번 그 기회를 놓쳤다. 후폭풍이 이렇게 거셀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겠지만 기저에는 우리 정서상 어떤 의견이 대세가 되었을 때 그에 맞서 다른 의견을, 그것도 자신이 냉혹해 보이는 의견을 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가수다”의 선택이 안타까웠던 것은 문제점이 있다는 점들을 서로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실 이런 의사결정 과정을 자주 겪어오지 않았는가. 주변의 의견이 대세가 되었을 때 그냥 순순히 따라가게 되지 않았던가. 상황과 체면과 분위기에 그냥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간단히는 음식을 주문할 때, 학급의 반장후보를 추천받을 때, 지지하는 서명을 부탁받았을 때 …
“나는 가수다”의 제작진과 출연진에 대한 비난을 하기 보다는, 그들도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고,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프로이며, 우리가 가진 문제점들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이해해주고 싶다.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에게 위로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사진출처: http://i2.media.daumcdn.net/photo-media/201103/24/osen/20110324131303906.jpg
# by | 2011/03/24 13:44 | Note | 트랙백 | 덧글(8)

출처: http://www.sxc.hu/photo/1068207
"총장은 글로벌 랭킹 높이기에, 교수는 논문 발표 '건수'에, 학생은 학점과 '스펙' 관리에 정신이 없다."
내게 이면우 교수의 비판은 단지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점으로 읽힌다.
대학의 문제는 정체성을 잃어 버린 사회,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는 잊은 채 일단 달려가는 사회의 한 단면일 뿐이다.
대학은 각종 평가기관(주로 언론사)이 만들어 내는 순위에 집착한다. 그런데 대학 순위의 상당부분은 논문발표 건수에 의존한다. 따라서 대학은 교수를 주로 논문편수를 기준으로 평가하게 된다. 그 결과로서 교수는 논문에만 집중하고 학생 지도는 상대적으로 등한시하게 된다.
이는 평가기관이 대학이란 기관이 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연구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기준을 만들었고 대학이 이 기준을 그대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학이란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대학이 사회에 제공하는 서비스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 없이 이 기준을 절대적인 것마냥 받아들이는 태도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대학 스스로가 무엇을 위한 기관인지에 대한 정체성 확립 없이, 순위의 기준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고찰 없이 남들이 만들어 놓은 지표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그 순위로 모든 것을 평가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학문탐구'보다는 '취업을 위한 스펙쌓기'라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과연 대학이 어떠한 기관이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정체성 없는 순위추구는 눈을 감은 채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무엇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고, 순위의 기준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고찰 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대학이 순위 경쟁을 하는 것, 교수가 승진심사를 위해 논문에만 집중하는 것, 학생들이 학점과 스펙관리에 정신이 없는 것은 모두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다른이가 무엇을 바라는지를 모른다는 동일한 문제선상에서 나온다.
Soojin Kwon Koh “일터의 도전적 과제, 손들고 자원하세요”
위 기사는 미시간대 MBA 입학기준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이 오해하고 있었던 기준은 아마도 "추천서"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추천서를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의 것을 받기를 원하지만 MBA 입학담당자의 판단 기준은 추천인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지원자의 업무 능력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가’이다. 이는 MBA에서 원하는 학생은 명망 있는 사람을 많이 아는 학생이 아니라 자신이 일했던 업종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라는 명확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는 것보다는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춘 전문가가 쓴 에세이가 좋은 것인 줄 알았고, 나의 업무능력을 잘 알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추천인보다는 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의 추천서가 좋은 줄로 알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미국 MBA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대로 적용한 것이다.
위의 경우에 반하여 우리 기업들이 과연 그들이 바라는 인재에 맞추어 합리적인 채용기준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기업인들이 흔히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쓸만한 인재가 없다.'고 불평하는데 요즘처럼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우리 회사의 채용기준은 엉망이고 우리 인사담당자는 사람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름 없다. 수백명, 심지어 수만명이 원서를 내는 시대에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쓸만한 인재가 없다고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그럼 왜 기업인들이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는 것인가.
그들이 바라는 인재에 대한 명확한 판단 기준이 없고 남들의 판단기준을 빌어 와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예를 들어 근래 다양한 면접 및 채용방법을 도입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아직도 지원자의 영어능력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외국어 능력의 중요성을 간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강조되며 그에 반해 영어실력에 대한 판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뛰어난 프로그래머나 엔지니어가 그들의 능력으로 평가받기도 전에 이미 영어에서 탈락하고 만다.
대학, 학생, 기업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달려 나가고 있고 그 결과는 발전적인 경쟁이 아닌, 생산성 향상과 별 관계가 없는 경쟁의 심화로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한 고민이 선행한다면 영어점수, 학벌, 성적, 대학순위를 바라볼 때 이를 절대적인 지표가 아닌 단지 하나의 참고자료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평가하는, 우리가 평가하는 기준이 왜 만들어졌는지, 무엇 때문에 중시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엉뚱한 지표만을 쫓고 있다.
고민하는 힘, 생각하는 힘이 가장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눈을 감고 달려가고 있다.
# by | 2011/03/23 15:18 | Note | 트랙백 | 덧글(0)
# by | 2010/10/20 14:42 | Not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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